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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보스턴 심포니

시옷_ 2012. 11. 24. 06:35
재즈라도 들으려고 AFKN에다 다이얼을 돌렸다. 시월 어떤 토요일 한 시경이었다. 뜻밖에도 그때 심포니 홀로부터 보스턴 심포니 75주년 기념 연주 중계방송을 한다고 한다. 나의 마음은 약간 설레었다.

1954년 가을부터 그 이듬해 봄까지에 걸친 연구 시즌에 나는 금요일마다 보스턴 심포니를 들으러 갔었다.

삼층 꼭대기 특별석에서 듣는 육십센트짜리 입장권을 사느라고 장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때마다 만나게 되는 하버드 대학 현대시 세미나에 나오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교실에서 가끔 날카로운 비평을 발표하였다. 크고 맑은 눈, 끝이 약간 들린 듯한 엷은 입술, 굽이치는 갈색 머리, 그의 용모는 아름다웠다. 오케스트라가 음정을 고르고 샹들리에 불들이 흐려진다.

갑자기 고요해진다. 머리 하얀 콘덕터 찰즈 먼치가 소낙비 같은 박수 소리를 맞으며 나온다. 배턴이 들리자 하이든 심포니 B플랫 메이저는 미국 동부 지방 불야성(不夜城)들을 지나 별 많은 프레리를 지나 해 지는 태평양을 건너 지금 내 방 라디오로부터 흘러 나오고 있다.

그는 이 가을도 와이드나 연구실에서 책을 읽고 벌써 단풍이 들었을 야드에서 다람쥐와 장난을 하고, 이 순간은 심포니 홀 삼층 갤러리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을 것이다. 꿈 같은 이태 전 어느 날 밤 도서관 층계에서 그와 내가 마주쳤다. 그는 나를 보고 웃었다. 그 미소는 나의 마음 고요한 호수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 음향과 같이 사라졌다. 중계방송이 끊어졌다. 칠천 마일 거리가 우리를 다시 딴 세상 사람으로 만들었다. 하이든 심포니 제1악장은 무지개와도 같다.

-피천득, 보스턴 심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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