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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시작은 송골매였다. 이유 그런 건 없었다. 그냥 송골매가 좋았다. 초등학교 때부터였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와 <모두 다 사랑하리>가 라디오에서 나오면 너무 좋았고, '젊음의 행진'에 송골매가 출연하면 넋을 놓고 바라봤다. 송골매와 구창모를 같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좋아하던 동네 누나에게 이쁨을 받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솔로로 데뷔한 구창모가 <희나리>와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로 '가요톱텐' 1위 경쟁을 할 때 마음을 졸이며 그의 정상 등극을 기원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송골매는 침체기에 들어갔다. 구창모가 빠지고 배철수의 주도 아래 <하늘나라 우리 님>으로 건재함은 과시했지만 분명 예전 같지는 않았다. 1985년, <하늘나라 우리 님> 덕분에 "곰뷔님뷔 님뷔곰뷔" 같은 옛말을 알 수 있게 됐다.

중학교 시절, 고등학생이던 형이 헬로윈과 유투의 카세트테이프를 사가지고 왔다. 서울음반에서 나온 [일곱 열쇠의 수호신]과 성음에서 나온 [전쟁] 앨범이었다. 얼마 후 형은 헬로윈이 더 맘에 들었는지 [여리고의 성벽] 테이프마저 사왔다. 나 역시 형을 따라서 그 테이프들을 들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처럼 듣는 순간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거나, 새로운 세계를 접했다거나, 후두부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거나, 앞으로 나의 인생이 바뀔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거나, 하는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그냥 왠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악들을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듣고 또 들었다. 당연히 <a tale that wasn't right(aka 임마하)>이 가장 먼저 귀에 들어왔고, 이어서 <eagle fly free>를 좋아하게 되었고, 13분이 넘는 <halloween>도 어려움 없이 들을 수 있게 됐다. 심지어 그 괴상한 카이 한센의 목소리마저 개성이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조금씩 '메빠'가 되어갔다. 메빠가 되어가면서도 여전히 송골매의 음악은 내 곁에 있었다. 1988년, 송골매 8집을 LP로 샀다. 이태윤이 만든 <외로운 들꽃>과 <어이하나 그대여> 같은 노래를 좋아하면서도 '이건 송골매의 음악이 아닌데.' 하는 복잡한 감정에 빠졌다.

그건 참 신기한 일이었다. 아니, 그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나의 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들은 강수지 같은 여가수를 좋아하고 핀업 사진을 모으면서도 동아기획이나 메탈리카, 건스 앤 로지스의 음악도 같이 좋아했다. 본 조비나 스키드 로우의 노래는 말 그대로 '인기가요' 같았다. 친구들 대부분이 음악을 좋아했고, 나는 그 가운데서 조금 더 음악을 좋아했다. <뮤직랜드>나 <핫뮤직>뿐 아니라 <포토뮤직><뮤직라이프> (+핫윈드) 같은 잡지들을 보면서 정말 잡다한 정보와 지식을 머릿속에 넣었다. 그맘때쯤 송골매는 마지막 히트곡 <모여라> 덕분에 TV 출연이 잦아졌다. 그리고 '자니윤쇼'의 하우스밴드 활동과 <모여라>의 코믹한 이미지 때문에 송골매를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그런 이들을 만날 때마다 '송골매가 그렇게 만만해보이냐? 병시나!'라며 격노하고 싶었지만 굳이 표출하진 않았다. 날 욕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내 부모 욕을 하는 건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내 욕을 하는 건 참을 수 없다"는 디씨 격언도 있지 않은가. 1990년, 송골매는 아홉 번째 앨범을 마지막으로 해체했다. 나의 송골매는 그렇게 날개를 접었다. 그 뒤 나는 학창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다양한 음악을 들으며 지내왔다. 하지만 그 많고 다양한 음악들 사이에 송골매의 음악은 여전히 끼어있었다. 앞으로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내 귀에 송골매, 꿀처럼 달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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