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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원고

조덕환

둥구 2016.12.05 10:58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 10호실. 10월 14일 새벽, 들국화의 원년 기타리스트였던 조덕환이 십이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장 방명록에는 이영재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젊은 시절 조덕환과 함께 '조·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던 그 이영재였다. 아침 8시부터 장례식장을 찾은 전인권은 조문객들과 얘기 중이었다. 이영재와 전인권, 그리고 조덕환이란 이름을 한꺼번에 마주치자 한국 대중음악의 가장 빛나던 시기를 만들어냈던 과거의 그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스쳐 지나갔다.

전인권은 페이스북에 조덕환의 사망 소식을 알리며 그와의 인연을 이야기했다. "70년대 신촌등지에서 만나 같이 어울렸고, 특히 우리가 만들어낼 수 없었던 그 당시에는 충격적인 노래"를 만들었다고 그를 소개했다. 그 노래들은 물론 들국화의 대표곡이기도 한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세계로 가는 기차', '축복합니다' 같은 곡이다. 조덕환이 이영재와 함께 활동하던 시절 전인권은 비원 앞 한 카페에서 노래하던 그를 처음 보았다. 전인권은 조덕환의 음악에 금방 매료됐고, 특히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를 좋아했다. 전인권보다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를 멋지게 부를 수 있는 보컬리스트는 없었다. 그렇게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는 들국화의, 그리고 전인권의 대표곡이 되었다.

조덕환은 특별한 음악가였다. 그는 당대의 국내 음악가들과는 다른 서구적인 감성을 갖고 있었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 모두가 배드핑거의 'Carry On Till Tomorrow'나 조지 해리슨의 'My Sweet Lord'처럼 분위기를 내기 어려운 곡들을 기막히게 소화해냈다고 공통적으로 증언했다. 단순히 서구화된 음악을 들려준 게 아니다. 조덕환은 거기에 한국인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를 더하였고, 로큰롤과 블루스와 포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체화해냈다. 전인권이 얘기한 "그 당시에는 충격적인 노래"가 만들어질 수 있던 배경이었다. 훗날 전인권과 조덕환이 나란히 자신의 앨범에 싣는 '(아버지) 웃고 살아요' 같은 노래 역시 한국적 정서가 가득 담긴 멋진 로큰롤이었다.

그렇게 조덕환은 들국화의 한 영역을 책임졌다. 멤버 네 명의 사진이 전면에 등장하는 들국화 1집의 재킷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들국화’ 하면 전인권과 최성원의 이름을 먼저 떠올리지만 조덕환과 허성욱의 존재도 그에 못지않았다. 곡 수만 따져도 최성원이 4곡, 조덕환이 3곡, 전인권이 1곡을 만들었다. 단순히 곡의 비율만이 아니라 조덕환의 곡은 최성원과는 다른 색깔을 보여주며 앨범에 긴장감을 주고 생기를 더했다. 허성욱의 건반 연주 또한 노래 전체를 감싸며 들국화 사운드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연주가 없는 들국화 음악은 상상하기 어렵다. 네 명이 함께하며 들국화 1집은 완벽해질 수 있었다.

이는 조덕환의 불운을 뜻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두가 한국 최고의 명반이라 칭하는 들국화 1집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그는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다. 아니, 조명 받을 기회가 없었다. 앨범을 발표하고 그는 곧바로 미국으로 떠났다. 당연히 그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지도 못했다. 조덕환은 들국화를 떠나 미국으로 간 '공식' 이유로 보수적이고 완고한 집안 분위기를 들었지만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개성에 매료되었던 우리는 그 개성이 너무 강해 밴드를 계속 해나가기가 힘겨윘"다는 전인권의 말에서 어느 정도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그들은 조금도 양보할 수 없는 음악적 고집과 자존심이 있었고, 그로 인한 다툼도 잦았다. 또 명목상 조덕환은 들국화의 기타리스트였지만, 리드 기타리스트가 되기엔 기술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결국 조덕환의 자리는 기타를 더 잘 치는 최구희와 손진태가 대신했다. 하지만 우리는 음악이 기술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조덕환이 빠지며 창작의 빈자리도 함께 생겨났고, 들국화의 2집은 확연하게 생기를 잃은 채 공개됐다. "그의 음악적 성정은 굉장히 뛰어났다. 그런데 테크닉이 약간 모자랐다. 그 뒤 테크닉이 뛰어난 연주자가 들어왔지만 본래의 빛남은 깨어졌다."는 선배 이주원(따로 또 같이)의 말이 이 상황을 함축적으로 말해주는 듯하다.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 그는 평범하게 살았다. 다양한 일을 하였고, 한국에서였다면 절대 볼 수 없었을 밥 딜런, 폴 사이먼, 슈퍼트램프 등 다양한 아티스트들의 공연을 보며 음악적 목마름을 해소했다. 평온한 날들이었다. 하지만 음악을 향한 가슴의 불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 한결 여유롭고 안정적이게 된 미국 생활을 다시 정리해야 했고, 일을 하고 있는 부인을 설득해야 했다. 음악에 대한 열정뿐 아니라 들국화 재결성이라는 의미 있는 목표도 있었다. 26년의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가장 큰 이유였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또 한 번 불운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2012년, 들국화는 언론과 대중의 뜨거운 조명을 받으며 재결성을 발표하고 활동을 재개했다. 하지만 거기에 '원년' 멤버 조덕환의 이름은 없었다. 물론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을 것이고, 멤버간의 사연과 감정을 모두 이해하기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결국, 이야기의 끝은 조덕환의 배제였다. 미국에서부터 오랜 시간 들국화의 재결성을 꿈꿔온 그에겐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는 눈을 감기 전까지도 들국화로 인해 속앓이를 해야 했다. 누구보다 들국화를 사랑하고 많이 생각했지만 그 진심이 실현되지 못하고 상실감만 쌓였다.

20년이 넘는 공백에도 그의 음악적 역량은 여전히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귀국한 뒤 발표한 [Long Way Home](2011)은 오랜 공백이 무색할 만큼의 역작이었다. 들국화 재결성만큼 주목 받지 못하고 메이저 레이블에서 나오지도 못했지만 비평적으론 들국화의 재결성 앨범보다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국에선 흔하게 들을 수 없는 서던 록 스타일의 '수만 리 먼 길'과 먼저 세상을 떠난 허성욱을 기리는 프로그레시브 록 '제한된 시간 속에서 영원의 시간 속으로'를 앨범의 시작과 끝에 두고 그 사이에 여전한 자신의 재능과 스타일을 채워 넣었다. 그는 이 재능을 들국화를 통해 펼쳐 보이고 싶어 했다.

세브란스 병원 18층의 한 병실. 지난 해 8월 처음 암을 발견하고 항암 치료를 반복해오던 그는 급격하게 상태가 안 좋아져 입원했다(올해 3월 처음 암을 발견했다는 '단독' 기사는 오보다). 투병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까닭에 위독해지고 나서야 소식이 전해졌다. 소식을 들은 전인권은 날마다 18층의 병실을 찾았다. 길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저 손을 잡고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조덕환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아침부터 내내 장례식장을 지켰고, 조덕환과 함께 들국화를 하지 못한 게 후회된다고 얘기했다 한다. 그렇게 들국화는 조덕환과 전인권 모두에게 회한으로 남게 됐다.

 전인권은 조덕환이 '수만리 먼 길'을 만들고는 "이건 인권이가 부르면 잘 어울리겠다"며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까? 조덕환은 자신이 그동안 만들어놓은 20곡의 노래를 악보와 함께 깔끔하게 정리해놓았다고 한다. 이 곡들이 어떤 형태로 공개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가 그랬던 것처럼 조덕환의 남겨진 곡을 전인권이 다시 부른다면 그 회한은 조금이나마 옅어질 것이다. (2016/시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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