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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인터뷰

유앤미 블루 (2007)

시옷_ 2016. 11. 23. 12:20

김학선: 근황은?

방준석: 계속 영화음악 쪽에서 영화음악 작업을 하고 있다.

이승열: 요즘 라디오 DJ 하고 있고, 앨범 활동 중이니까 공연도 간간히 하고 있다. DJ 하는 게 처음보다는 재미있어졌다. 처음에는 간혹 힘들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이제 5개월 정도 지나니까 재밌다,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좀 자연스러워진 것 같다. 처음 시작할 때 1년은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고 시작한 거니까 아직 반 못 채웠으니 나머지는 채우고 싶다.

김학선: 이번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기획에 유앤미 블루(U&Me Blue) 앨범 두 장 모두와 이승열 씨 솔로앨범까지 선정이 됐다. 그래서 지금 인터뷰도 하고 있는 건데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나?

이승열: 겁났다. 과연 무슨 얘기를 들을 것인가.(웃음) 수많은 앨범들 가운데 선택됐다는 게 기분은 좋은데, 선택을 받지 못한 앨범들 가운데 더 좋은 앨범이 있을 텐데,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방준석: 나는 나중에 알게 됐는데 일단은 감사하게 생각한다. 유앤미 블루라는 게 지금 우리에겐 너무 동떨어져있는 건데, 아직까지도 우리의 앨범을 사람들이 듣고 공유하고 공감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이런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었다.

김학선: 그래서 이번에 유앤미 블루의 앨범들에 관한 얘기들을 주로 하려고 한다. 둘이 처음 만났던 순간에 대해서 얘기를 해 달라.

이승열: (웃음) 학창시절로 돌아가서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봤다. 학내 기독교 모임에서 처음 만나게 되고, 기타를 치게 된다는 걸 알게 되고, 룸메이트로 함께 지내면서 그때부터 친해졌다. 곡도 써보고 잼도 같이 하다가 꿈이 커진 거다.

방준석: 모임에서 봤다고 얘기를 했는데 실은 담배를 피려고 밖에 나갔다가 거기서 만나게 된 거다. 그때 여러 가지로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에 반가웠고 좋았었다.

김학선: 어떤 점에서 동질감을 느꼈나?

이승열: (웃음)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그런 모임도 한두 시간을 못 참고 밖으로 담배를 피러 나온 상황이었으니까 거기를 빠져나온 죄책감을 같이 나누면서 거기에서 서로 동질감을 느낀 거 같다.(웃음)

김학선: 둘이 같이 음악을 하자고 했을 때 훗날 프로 뮤지션이 될 거라는 미래가 그려져 있었나?

방준석: 절대로 아니다. 대학교 때 처음 만나고 간간히 밴드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크게 세상으로 나갈 거라는 생각지 않았다. 은연중에 바람은 있었을 수 있지만 그런 계획을 가지고 시작하지는 않았다.

이승열: 데모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때부터 남에게 들려줄 만한 그런 퀄리티 있는 노래를 만들어보자,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방준석: 그런데 그게 굉장히 막연했다. 데모긴 했지만 우리의 것을 기록으로 만들자, 하는 그런 작업 자체가 우리에겐 너무 생소했다. 그리고 그때는 우리가 미디 이런 걸 몰랐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날로그 테이프에 담아가면서 작업을 했는데 그 작업이 우리에겐 도전이기도 했고 새롭기도 했었다. 그래서 '이 데모를 가지고 어떻게 해야겠다'라는 건 나중 문제였고 일단은 그 작업 자체가 우리에겐 큰 의미였다.

이승열: 데모를 만들면서 주변에 모니터를 했는데 그때 생각보다는 더 좋은 반응을 얻었다. 시끄럽다고 하거나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도 의외로 괜찮다는 반응이 있어서, 마음의 동요까지는 아니더라도 씩 웃으면서 '혹시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프로필 사진이라고 하는 걸 준비해놓고 그랬던 기억도 난다.(좌중 웃음)

김학선: 데모에 1집에 들어가 있는 노래들이 들어가 있던 건가?

방준석: 그렇다. 거기에 꽤 들어가 있었다. 1집 앨범이 데모 작업의 연장선이었다. 1집에서 했던 작업 방식이나 그런 것들이 그대로 데모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이승열: 더 좋아진 장비로 하니까 더 좋아진 부분도 있고, 나빠진 부분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김학선: 방준석 씨가 한국에 와서 데모를 돌렸다고 들었다.

방준석: 미국에 있을 때 한국에서 프로듀서 일을 하는 분을 만나게 돼서 먼저 드렸었다. 그리고 이후에 서울에 올 기회가 있어가지고 데모를 같이 들고 나왔고,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몇 군데 돌려봤었다. 그때 반응은 썩 좋진 않았다. 너무 이국적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고, 그 와중에 우리와 1, 2집을 함께 하게 되는 송홍섭 씨와 연결이 됐다. 송홍섭 씨에게 직접 연락이 온 건 아니고 아는 분을 통해서 송홍섭 씨가 운영하는 송 스튜디오로 가게 됐다. 가니까 녹음실에 계셨는데 거기서 바로 들으셨다. 한 5분 듣고는 "어, 재밌다. 같이 하자." 이렇게 얘기를 하셔서 같이 하게 됐다.

김학선: 그래서 미국에 돌아가서 이승열 씨에게 같이 하자고 얘기한 건가?

방준석: 전화를 했다.

이승열: 나는 은연중에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좌중 웃음) 어떤 반응이 나올까 궁금했었다. 그때 송홍섭 씨 말고 두 군데에서 긍정적이었다는 얘기를 했었던 것 같다.

김학선: 윤수일 씨의 기획사도 있었던 걸로 알고 있다.

방준석: 아, 맞다. 거기도 긍정적인 반응이었는데 그렇게 구체적으로 얘기를 했던 건 아니었고, 송 스튜디오가 가지고 있던 메리트만큼은 아니었다.

이승열: 어린 나이에 봤을 때는 스튜디오가 컸던 것 같다. 준석이가 그때 스튜디오가 굉장히 탐이 난다는 얘기를 했었다.

김학선: 그래서 앨범을 제작하러 한국에 오게 된 건데 비행기 안에서 어떤 생각을 했나?

이승열: 비행기에 있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가지고.(웃음) 그 당시에 열여섯 시간을 비행기 안에 있었기 때문에 일단 빨리 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기념적인 날이니까 내려가지고 세레모니 식으로 우리 나름의 의식을 하자"라고 얘기를 했었다. 나는 10년 만에 처음 오는 거였기 때문에 싸구려 시가를 사서는 공항에 내리자마자 한 대 피고 땅에다 키스를 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키스는 안 하고 그냥 시가만 폈다.(웃음)

김학선: 한국으로 음악을 하러 오면서 기대감과 두려움 가운데 어떤 게 더 컸나?

방준석: 기대감이 컸다.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는데 일단은 물에 뛰어들 듯이 뛰어들어서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과, 우리만의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다는 것에 굉장히 힘이 넘쳤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 말고도 당시 송 스튜디오에는 선배 뮤지션들이 많이 계셨었다. 당시에는 버클리 음대를 다녀오신 1세대 분들이 많이 계셨었고, 우리가 좋아했었던 뮤지션들이 많이 계셨기 때문에 그들과 같이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많이 기대가 됐다.

이승열: 그분들에게 많이 배웠고, 자극도 받았고, 이렇게 음악을 해보고 싶다거나, 좋은 점은 뺐어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김학선: 한국에 들어와서 처음에 생활은 어떻게 했나?

이승열: 나는 돈을 좀 가져왔었다.(좌중 웃음) 비상시를 대비해서. (방준석을 보며) 너도 좀 가져왔었어.

방준석: 그랬나? 생활이 평탄하지만은 않았었다. 기획사가 우리에게 많은 배려를 해주긴 했지만 워낙 자금 면에서 여유롭다거나 그런 회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이런 거구나, 하면서 생활을 했다. 물론 그때는 지금보다 나이도 젊고 그랬기 때문에 그런 게 크게 불편하거나 그렇진 않았었다.

이승열: 우리가 기대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기대에 못 미쳤다거나 그런 건 없었다. 그냥 이게 현실이구나, 받아들이면서 몇 달을 보냈던 것 같다. 반면에 지금 생각해보면 녹음실을 마음껏 쓸 수 있었다는 건 참 좋았던 것 같다. 그때는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편한 건지를 잘 몰랐었지만.

방준석: 그때는 녹음실을 마음껏 쓴다는 게 우리에겐 너무나 당연한 거라고 생각을 했다.(웃음) 그 자체가 우리 생활이었으니까.

이승열: 의식주를 스튜디오 내에서 다 해결을 했다. 숙소가 있었지만 스튜디오에서 24시간 붙어있고 싶었다.

김학선: 한국에 와서 앨범 준비는 얼마 정도 한 건가?

방준석: 그게 준비랄 것도 없이 바로 녹음엘 들어갔다. 연주나 기본적인 것들을 녹음하는 데 있어서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노래를 녹음하면서 굉장히 오래 걸렸다. 송홍섭 씨도 음악적으로는 맘대로 하라며 아무 터치도 안 하셨지만 노래에 있어서는 굉장히 공을 많이 들이셨다. 노래만 굉장히 오래 했다.

이승열: 노래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시간이 더디 가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스튜디오 들어갔다 나오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던 것 같은데 노래에 있어서는 딱 벽을 마주친 기분이었다. 

김학선: 나는 지금까지 송홍섭 씨가 1집의 프로듀서일 거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인터뷰 준비를 하면서 다시 보니 셀프 프로듀싱 앨범이었다.

방준석: 음악적으로는 다 맡기셨다. 사운드라든지, 연주라든지 이런 모든 부분에 있어서는 굉장히 오픈되게 우리에게 맡기셨다. 단 노래만 빼고.(웃음)

이승열: 지적은 하셨다. 웃으면서 "이건 좀 맞지 않는데…."라고 말씀을 해주실 때가 있었는데 그러면 우리는 "아, 그런가요? 저희는 좋은데요."라고 얘기하기도 했었다.(좌중 웃음) 그럴 때도 화 안 내시고 허허허 웃으면서 넘어가셨다.

김학선: 첫 앨범부터 그렇게 셀프 프로듀싱을 맡으면 부담감도 있었을 텐데.

방준석: 그 당시에는 그런 개념조차 없었던 것 같다. 당연히 그런 부담감을 갖는 게 맞는 건데, 그때는 그냥 우리가 좋아하는 소리나 좋아하는 어떤 것들만 가지고 덤벼들었기 때문에 그런 개념조차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런데 다행히 스튜디오에는 엔지니어 분들도 계셨고 그랬기 때문에 우리가 셀프 프로듀싱을 했다고 해도 그게 어느 정도는 공유된 작업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모르는 영역에 있어서는 그들이 오퍼할 수도 있고, 우리가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는데 그 당시 우리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려낼 수 없는 것에 있어서는 그분들과 같이 얘기를 나누고 함께 만들어 나갔다.

김학선: 1집의 크레딧을 보면 약간 모호하다. 베이스나 드럼 같은 것들이.

이승열: 베이스 기타는 김병찬 씨가 두 곡을 쳤다. <흘러가는 시간들... 잊혀지는 기억들>과 <영화 속의 추억>. 그리고 나머지는 우리가 쳤다.

김학선: 그럼 드럼은 프로그래밍으로 찍은 건가?

방준석: 드럼은 리얼 연주를 처음에 한 번 시도했었다.

이승열: 아주 초반에 그랬었다. 그런데 들어보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웃음) 그때 주변의 반응은 어땠지?

방준석: 우리가 처음에 데모를 만들 때는 리얼 드럼을 쓸 수가 없으니까 드럼 머신으로 처리를 했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아서 그런 방향으로 작업을 했다. 그러다가 한국에 와서 초반에 작업을 할 때 때마침 미국에서 유앤미 블루로 함께 활동을 했던 베이스와 드럼 치는 친구들이 다 서울에 있게 돼서 그 친구들에게 세션을 부탁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나온 소리들이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생소하게 들렸다. 녹음 시스템이라든지 그런 거에 대한 노하우가 전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가 합주한 걸 듣고는 우리 생각과는 너무 다른 소리들이 나와서 굉장히 놀랐었다.

이승열: 주변에 신윤철 씨나 다른 아티스트들은 주로 드럼을 리얼 연주로 녹음을 하는 편이었다. 그런 게 부러웠고 또 거기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리얼 연주를 시도해보려고 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근데 1집은 프로그래밍이 사실 맞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김학선: 유앤미 블루 이전에 H2O가 모던 록 앨범을 냈다가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그 이후에 유앤미 블루가 한국에 왔을 때는 그런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마디로 낯선 존재, 섬 같은 존재였는데 유앤미 블루가 그때 한국의 대중음악계를 바라보며 가졌던 기분은 어떤 거였나?

방준석: 나는 일단 가요를 되게 좋아했었다. 관심을 갖고 듣고 하면서 많이 좋아했었고, 좋아하는 아티스트들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 중의 일부분이 되고자 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게 뭐야, 우리가 이 음악계를 다 바꿔놔야지.' 이런 생각은 전혀 없었었고, 그냥 우리가 할 줄 아는 거를 그대로 했었던 거 같은데, 다만 이걸 가지고 이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던 것 같다.

김학선: 그럼 예를 들자면, <가요톱텐>에 나가서 1위를 한다면 흔쾌히 나가서 수상을 할 생각도 그때는 갖고 있었던 건가?

이승열: 그런 거에 대한 상상 자체를 별로 안 했던 거 같다. 우리가 가졌던 첫 공개방송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때 신동엽 씨랑 고소영 씨가 같이 진행하는 라디오 공개방송 무대에 처음 서고 나서 점점점 더 나쁜 쪽으로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MR 틀고 AR 틀고 립싱크 하는 건 어디에나 있는 거지만 계속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게 너무 큰 부담이었다. <가요톱텐> 같은 건 그 당시에 생각도 못 해봤다.(웃음)

방준석: 그러니까 지금 말한 것처럼 그런 현실에 대한 정보 같은 게 전혀 없었다. 앨범을 내면 당연히 공연만 하고 이럴 거라 착각을 했던 거다. 방금 말한 것처럼 AR 트는 건 세계 어디에나 있는 건데 거기에 적응을 못한 측면도 있고, 또 그런 시스템 자체가 우리의 음악과 매치시키기 굉장히 힘든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잘 모르겠다. 그래도 노력은 했었던 것 같은데 여전히 힘들었던 부분이다. 그 당시에 댄스 음악 같은 걸 하는 분들은 보여줄 게 많았지만 우리는 전혀 보여줄 게 없었었다.

김학선: 1집에서 <싫어>란 노래가 한국 생활의 경험에서 나온 노래인가?

이승열: "한국 사회에서 정말 그런 느낌을 받았느냐?"라고 묻는 거라면 그런 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1차원적인 것보다는 더 깊은 종류의 것이었다. 그런데 언어적인 재주랄까 그런 게 모자라서 그 이상으로 쓰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가사가 100%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다보니까 노래하는 것도 힘들었다. 굉장히 힘들어하면서 노래했던 기억이 난다.

방준석: 그게 나름의 배신감일 수도 있다. 나는 여기에 속해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까 외면당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들이 있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오는 데에 있어서 우리 나름의 시행착오들이 있었다.

이승열: 그리고 그 노래 같은 경우는 리듬에 굉장히 공을 들인 노래다. 만들고 보니까 비틀즈(Beatles)의 [Revolver] 앨범에 <Taxman>이라는 노래하고 리듬이 흡사하다는 걸 알게 됐다. 영향을 받아서 만든 게 아니고 우연찮게 그런 흡사한 리듬이 나온 거라서 그때부터 그 리듬을 어떻게 살릴까 고민을 많이 했다. 그래서 이 리듬에 이런 가사를 한 번 써보면 어떨까, 하고 모험을 해본 거다. 그런데 제대로 나온 것 같지는 않다.

방준석: 나도 그렇게 생각을 한다.(좌중 웃음) 제대로 나온 것 같지가 않은데, 그때는 그런 것들이 어린 마음에 우리 나름대로의 발산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말한 대로 제대로 나온 것 같지는 않다.(웃음)

김학선: 당시 송 스튜디오에는 정원영 씨나 한영애 씨, 신윤철 씨 같은 분들이 계셨는데 이분들은 유앤미 블루의 음악을 듣고 어떤 얘기를 해줬나? 

이승열: 그분들이 우리를 버르장머리 없게 만들어주신 거 같다. 어렸을 때 할머니가 키운 애들이 유난히 자기중심적으로 변하는 것처럼 나 역시 그랬었다. 그분들은 누군가한테 우리를 소개시켜줄 때도 "얘네 음악 들어봤어? 죽여." 매번 이런 식으로 말씀을 해줬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계속 자주 듣다 보니까 10만큼 좋은데 100만큼 좋은 거라고 착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 칭찬과 격려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고집 아닌 고집을 피우면서 우리가 할 줄 아는 한 길을 팔 수 있었던 거 같다. 그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만약에 우리가 욕만 얻어먹었다면 과연 어떤 음악을 하고 있을지, 지금 생각하면 참 고맙고 감사하다. 지켜준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김학선: 앨범이 상업적으로 실패를 했다. 실패의 이유가 뭐라고 생각했나?

방준석: 한참동안 이런 생각을 했었다. 그 당시에 음반을 움직이는 데 있어서 라디오와 TV 같은 매체가 큰 힘을 발휘했는데, 다 그랬다는 건 아니지만 당시 PD들의 (뇌물수수) 사건도 터지고 그런 관행이 굉장히 흔하지 않았나. 그래서 우리가 큰 기획사의 가수들과 같은 동등한 기회가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고 그게 어느 정도 수긍이 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현실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지금의 생각은 우리의 음악이 분명히 낯설었다는 거다.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그런 걸 떠나서 사람들에게 초대의 뉘앙스보다는 그냥 들으려면 듣고, 이런 생각이었던 거 같다. 의도된 건 아니었지만 대중들과의 거리는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이승열: 나는 땅이 좀 더 넓고 인구가 좀 더 많았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랬으면 이런 걸 좋아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도 더 있었을 거 같고 많이 달랐을 거란 생각을 한다. 지금도 간혹 그런 생각을 한다.

김학선: 2집 준비는 1집을 내고 얼마나 지나서 시작하게 된 건가?

방준석: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진 않았던 거 같다.

이승열: 94년 5월인가 1집이 나오고 96년에 2집에 나왔으니까 95년을 통틀어서 준비를 했던 거 같다.

김학선: 2집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둘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고 조금 소원해졌다고 들었다.

방준석: 시간이 이렇게 오래 흐른 뒤에 생각해보면 그때 상황적으로 굉장히 코너에 몰렸었던 것 같다. 그 와중에 이제 앨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에 심적으로 정신적으로 굉장히 스트레스가 있었다. 또 나의 성격상, 이건 참 안 좋은 건데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안으로만 들어가려고 하는 게 있다. 지금보다도 그때가 더 심했던 것 같은데 그런 것들 때문에 이제 대화나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통로가 비교적 좁아졌었다. 그래도 방향성이나 이런 것들은 여전히 공유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승열: 대학 시절부터 해서 같이 지낸 게 7년이 넘다보니까 트러블 요소들이 생겼을 수도 있고, 또 처음에는 대화를 정말 많이 했었는데 상황이 어렵다 보니까 점점점점 서로 간에 말이 줄었던 것 같다.

김학선: 그 어려웠던 부분에는 경제적인 면도 들어있는 건가?

방준석: 당연히 있었다. 그래서 나도 나 나름대로, 승열이도 승열이 나름대로, 생활은 해야 되니까 이런 일, 저런 일을 했었던 것 같다.

김학선: 2집을 제작할 때 어떤 음반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나?

이승열: 회의 장면이 기억이 난다. 이런 스튜디오에서 송홍섭 씨랑 땅바닥에 원을 그리고 앉아서 얘기를 했는데 "이번에는 될 만한 판을 만들자"라는 게 요지였었다. 정확히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 같다. 그때 나는 웃으면서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는 모션을 취하긴 했어도…. 방준석 씨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나는 약간은 알 거 같다. 좀 더 파퓰러한 거를 준석이 어깨에다 이렇게 송홍섭 씨가 얹어놨던 상황이었다.

김학선: 2집 첫 번째 노래가 다른 사람의 노래이다. 그게 혹시 그런 대중성을 염두에 둔 전략적인 타이틀곡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방준석: 아, 그건 아니고 그게 드럼을 쳤었던 최철이란 친구의 노래였다. 그 친구가 드럼도 치고 기타도 치면서 노래를 만들기도 했었는데 그 노래가 너무 좋았다. 

이승열: 일본 유학생이었다. 전화가 와서 어떻게어떻게 만나게 됐는데, 드럼을 친다고 해서 우리가 꼬신 거다. 근데 그때 그 친구가 직접 기타를 치면서 연주를 해줬던 거 같다.

방준석: 꽤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노랜데 한 번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앨범에 넣게 됐다.

김학선: 지난번에 이승열 씨가 유앤미 블루의 앨범을 가리켜 "라이브로 재현이 불가능한 앨범"이라고 표현을 했었다.(좌중 웃음) 그런데 2집에선 더 그게 더 과해졌다고 생각을 한다. 그 당시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었나?

이승열: 그런 생각을 별로 안 했던 거 같다. 만약에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해줬다면 그런 쪽으로 고려를 해봤을 거다. 그리고 그런 게 더 어렵지 않나. 표현하고자 하는 게 10갠데 그 10개를 하나, 두 개 가지고 표현해내는 것. 그런데 나 자신은 그런 시도를 아예 안 했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오버 더빙을 다섯 트랙, 여섯 트랙 하는 게 전혀 나쁜 짓이라고, 아니, 나쁜 짓이라고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은 안 하지만, 후회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었다.

방준석: 지금도 후회는 안 한다. 라이브 못 할 것도 없지 뭐. 사람만 많으면.(웃음)

김학선: 2집을 1집과 비교해보면 사운드의 질감도 더 두터워지고 기타 톤도 더 뚜렷해졌다.

방준석: 그게 환경이 바뀌었다. 2집을 녹음한 스튜디오가 바뀌었고, 그때 당시로서는 굉장히 좋은 기자재들이 녹음실에 처음 들어왔었다. 누군가 굉장히 신경 써서 만들어놓은 새로운 스튜디오여서 앰프라든지 드럼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모두 새로운 것들이었다. 1집 때는 기타 앰프를 그렇게 많이 쓰진 않았었는데, 2집에서는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이 썼고 기타 톤도 신경을 많이 써서 녹음을 했다. 드럼도 전부 리얼 드럼으로 연주를 했고 그런 면에 있어서는 질감에서 다를 수가 있을 것이다.

김학선: 혹시 2집 작업을 할 때 방준석 씨가 실연의 아픔 같은 게 있었나? 노래들이 심상치 않다.(웃음)

방준석: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웃음) 아까 승열 군이 얘기했던 '될 만한 거'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 근데 그런 거는 우리에겐 한정돼있는 세계다 보니까 애매모호한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그 당시에 느꼈었던 것들을 그대로 쓰는 게 낫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가사 면에서 그런 가사들이 더 많이 나왔다. 

김학선: 개인적으론 2집이 1집보다 마음에 든다. 좋은 싱글도 2집에 많았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럼에도 2집 역시 실패를 했다.

방준석: 우리에겐 그게 잘 된 거 같다.(웃음) 앨범을 만들면서 굉장히 열심히 했다. 한 눈 안 팔고 굉장히 에너지를 쏟아서 만든 결과물인데 다행히도 소수지만 그 정성과 느낌을 가져간 분들이 있었던 거 같다. 그래서 여태까지도 그 끈이 이어져오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앨범이 실패함으로써 딴 데 한 눈 팔지 않고 좀 더 길게 오랫동안 음악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거 같다. 그때 스타가 안 됐다는 거에 대해서 다행이라고 생각을 한다. 애매모호하게 됐으면 더 이상했을 거 같고, 완전 스타가 됐었다고 생각을 하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굉장히 다른 곳에 있을 것 같다.

김학선: 어느 순간부터 라이브 클럽에서 활동을 했다. 

방준석: 일단 방송을 안 하면 달리 할 게 없었다. 공연을 매일 할 수도 없는 거였고. 그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라이브 클럽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게 굉장히 좋았었다. 거기서 공연을 한다는 자체가. 정기적으로 일주일에 몇 번씩 공연을 한다는 게 재미있었고 좋았었다.

이승열: 라이브 클럽 시작한 게 2집 활동할 때였는데 그때도 여러 매체에 주목을 받게 하려는 노력들은 사실 더 있었다. 그래서 음악 프로그램에 오프닝으로 신인 밴드, 루키, 이런 식으로 소개된 적도 있었는데 그게 사실 충분치 않은 노출이었을 것이다.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가 불렀던 노래를 커버하는 그런 식의 출연이어서 실제로 우리 노래는 방송이 안 됐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난 그런 딜레마가 있다. 충분치 않은 노출이었지만 만약에 그게 운명적으로 될 그런 거였다면 한 번이 아니라 반 번만 노출이 됐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그래서 성공하고 하는 거는 운명적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런다. 그리고 클럽을 하게 된 거는 공연 기획하시는 분들이나 지인들이 클럽 공연이 치유가 될 거라는 생각으로 우리에게 해보라고 하면서 시작하게 된 거다. 이렇게 놔두는 것보다는 여기에서 마음껏 연주를 하게 하는 게 숨통을 틔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처음 시작을 한 거다.

김학선: 두 장의 앨범 가운데 더 애정이 가는 작품이 있나?

방준석: 둘 다 애정이 간다. 앨범 자체보다도 그 당시의 우리 모습들이 앨범을 통해서 기억이 되는 거기 때문에 두 장 모두 애정이 간다. 그리고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굉장히 노력해서 만든 앨범들이기 때문에.

이승열: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은 어떤 게 더 좋을 수도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둘이 다른 거 같다. 다른 거는 비교를 못 하니까 어떤 때는 이게 더 좋고, 어떤 때는 저게 더 좋고.

김학선: 먼저 짚고 넘어가자면, 지금 유앤미 블루는 해체 상태인 건가?

방준석: 아니다. 우리는 해체를 한 적이 없다. 우리가 마지막 공연을 했을 때 공연 주제가 쉼표였다. 잠시 쉬어가자는 의미에서 그런 제목을 붙였었는데 그 제목이 그때 상황에 딱 맞았던 거 같다. 일단은 한 숨 돌리고 가자는 의미였는데 어느새 11년이 지나버렸다. 가끔씩 우리끼리 만나서 유앤미 블루를 다시 한 번 해야 되지 않나, 라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유앤미 블루를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터라고 생각하고 이제 기록을 만들어야 할 텐데 어떤 의미를 갖고 어떤 방식으로 만들까 하는 고민을 요즘 하고 있다.

김학선: 활동을 중단하고 이승열 씨는 미국으로 돌아갔고, 방준석 씨는 한국에 남았다. 둘은 그때 각자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건가?

이승열: 난 돌아올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좀 여의치가 않았다. 그쪽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그 일들을 끝내고 최대한 빨리 돌아온 게 2000년이었다. 준석 씨는 98년부터 영화음악 작업을 한 거 같고.

방준석: 승열 군이 가고 나서 일단은 굉장히 막막했다. 그때 당시 내 생각은 일단은 생존하는 거였다. 밥을 먹고 산다는 개념보다도 '어떻게 음악을 계속 하면서 여기에 있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다.

김학선: 방준석 씨는 한국에 혼자 남았을 때 이인이란 이름으로 임재범 씨와도 작업을 했다. 의외의 조합이었다.

방준석: 얘기한 것처럼 그 시기에는 생존을 해야 한다는 마인드였기 때문에 거의 모든 작업에 대해 오픈돼있었다. 기회만 주어지면 뭐든지 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임재범 씨 작업도 어떻게 연결이 돼서 함께 하게 된 거다. 그런데 임재범 씨 같은 경우는 내가 워낙에 좋아하는 보컬리스트였기 때문에 즐겁게 작업을 했다.

김학선: 방준석 씨는 영화음악 작업을 계속 해오고 있는데 작업이 본인과 잘 맞는 편인가?

방준석: 글쎄, 잘 모르겠다.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고 음악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거에 대해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영화음악 일을 계속 지속적으로 하다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기록이라는 게 나의 기록, 우리의 기록, 그러니까 유앤미 블루의 기록이 있는데 영화라는 것은 그런 것들과는 성격이 약간 다른 면이 있는 거 같다. 그런 면 때문에 다른 작업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지금은 멀리 느껴지긴 하지만 유앤미 블루라는 것이 어쨌든 우리를 계속 따라다니는 거고, 우리가 같이 안고 가야하는 거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김학선: 다른 작업이라는 것은 유앤미 블루 작업을 말하는 건가?

방준석: 당연히 유앤미 블루도 있고, 승열이 같은 경우엔 자기의 기록도 갖고 있는데 난 아직 그런 기록이 없다. 그래서 개인 작업에 대한 생각도 갖고 있다. 내가 남겨놓을 수 있는 기록이란 건 어떤 게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

김학선: 방준석 씨는 유앤미 블루 시절의 음악과 지금 하고 있는 영화음악 작업을 비교해볼 때 음악적 지향점이랄까 그런 게 바뀌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나?

방준석: 지금 지향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웃음). 다행스러운 것은 여기 계속 있으면서 여러 가지에 대한 열린 마음이 생긴 거 같다는 거다. 음악 처음 할 때는 우리 음악이 최고고 나머지는 아니야,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굉장히 많은 것을 접하게 되고 해야 되고 하니까 스타일이나 그런 면에선 오픈돼있는 거 같기도 하다. 

김학선: 이 질문을 한 이유는 방준석 씨가 영화음악 작업을 하고 어어부 등과 같이 활동을 하면서 예전 유앤미 블루 시절의 감성과는 좀 멀어진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어서였다.

방준석: 내가 멀어져 있을 수도 있긴 한데 글쎄, 잘 모르겠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승열 군과도 가끔 얘기를 한다. 그런데 나중에 우리가 유앤미 블루를 다시 할 때 예전의 유앤미 블루를 지나치게 염두를 두고 너무 향수 어린 시각으로만 작업을 한다면 그게 굉장히 무의미한 작업일 거라고 생각을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어쨌든 나도 다른 곳에 와있고, 승열이도 다른 곳에 와있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우리만의 것을 찾아서 하는 게 맞는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게 과거를 외면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만약에 하게 된다면 지금의 우리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김학선: 둘이 갖고 있는 음악적 장점 가운데 서로 부러운 점이 있다면?

방준석: 일단 노래를 잘 한다. 목소리 톤이 너무 좋다. 아직도 잊을 수가 없는데, 처음 이 친구 방에 갔을 때 통기타가 보이기에 승열이에게 노래를 막 해보라고 했었다. 전혀 기대를 안 하고 노래를 해보라고 했다가 승열이가 무슨 노랜가를 불렀는데 정말 굉장히 놀랐었다. '이건 어디 음반에서나 들을 수 있는 목소린데?'라는 생각을 하며 많이 놀랐었다. 근데 이 얘기는 승열이에게 한 번도 안 했었다.(웃음) 그리고 또 하나는 똑같은 것도 내가 바라보는 시각과는 굉장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다. 그게 작업을 하면서도 계속 연장이 됐었고, 그런 면에서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친구긴 하지만 음악 하는 동료로서 굉장히 높이 사는 부분이다.

이승열: 준석이는 르네상스맨 같은 요소가 굉장히 많다. 기대 안 했던 부분에서, 예를 들자면 유화에도 놀랄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고, 영화음악 작업도 과연 이거를 한 사람이 한 것일까, 할 정도로 변화무쌍하고 훌륭하게 소화할 수 있는 그런 기획력이 있는 거 같다. 즉흥적인 거야 특이한 사람들이 잠시 쏟아낼 수가 있지만, 그 순간을 벗어나서 멀리 내다보는 것에 있어서는 준석이가 탁월한 재능이 있다. 유앤미 블루 때의 준석이 목소리나 스타일도 지금 와서 생각을 해보면 오히려 더 앞서갔던 것 같다.

김학선: 유앤미 블루를 다시 시작하라는 팬들의 요구가 많은데 그런 게 혹시 부담이 되거나 하지는 않나?

방준석: 부담은 되지 않는다. 고맙게 들린다.

이승열: 부담이 됐다 안 됐다, 됐다 안 됐다 그런다(웃음). 나에게 어떤 통로나 전환점이 필요할 때 유앤미 블루가 그런 걸 충족시켜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가 있는데, 그런 기회가 있다는 게 흐뭇하기도 하다. 근데 우리가 유앤미 블루 음악을 냈는데 우리나 팬들 모두에게 실망스런 결과물이 나오는 그런 상황에 대한 부담감은 약간 가지고 있다.

김학선: 언젠가는 다시 할 거라고 하지만, 그 '언젠가는'이 과연 언제가 될지 궁금하다.

방준석: 요즘 그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보려고 하고 있다. 가만 놔두니까 시간이라는 게 굉장히 빨리 간다. 그래서 빨리 계획을 하고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을 요즘에 하고 있다.

김학선: 마지막 질문이다. 유앤미 블루를 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기억을 하나 꼽는다면.

이승열: 홍대 블루 데블 클럽에 들어갈 때 고민이 참 많았었다. 그때는 우리와 함께 할 베이스와 드럼이 없는 상태였다. 우리끼린 어떻게든 가겠는데 같이 할 사람이 없다보니 이건 완벽함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만족을 못한 상태로 오디션도 보고 소개도 받으면서 트라이아웃을 많이 했었다. 그러다가 우리와 끝까지 함께 갔던 멤버를 만나게 됐는데 그날이 나한테는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 친구들과 함께 처음 합주를 하면서 준석이에게 영어로 "This is better than sex"라고 얘기를 했었다. 훨씬 더 충족감을 느끼게 해주고 희열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순간이었다.

방준석: 나 역시 그 시절, 그 상황들이 굉장히 좋았었다. 클럽이라는 공간이 관객이 많지도 않고 그랬었지만 무대 위에서 연주를 한다는 자체가 모든 것을 충족시켜준다는 느낌이었다. (2007/네이버 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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