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시인

시옷_ 2010. 5. 2. 14:18

절망보다 분노하라, 울기보다 다짐하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미당의 죽음 앞뒤로 문단 안팎을 소란스럽게 한 그의 정치적 몸가짐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미당의 경우를 두고 시와 정치의 관계를 따져보려는 논자들이 쉽게 치이는 덫은 문학과 삶, 또는 문학과 정치를 일관되게 설명하고자 하는 욕망의 유혹이다. 그래서 그의 행적에 비판적인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그의 시적 성취의 허약함을 찾아내려 하고, 그의 문학적 성취에 매혹된 사람은 되도록 그의 행적을 호의적으로 이해하는 데 기여할 상황논리를 구성하려 애쓴다. 이렇게 문학과 삶을 내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오캄의 면도날처럼 매력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설명의 깔끔함이 아니라 사실 앞에서의 겸손함이다.

그렇다면 사실은 어떤가? 미당의 삶은, 적어도 그의 공적 자아의 행적은, 시시한 것이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젊은 시절 태평양전쟁 시기에 쓴 전쟁선동시든 갑년이 넘어 군사깡패에게 바친 생일 축시든, 그런 문자 행위가 그에게 절박한 신체적 위협과 함께 강요되었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그런데도 미당은 천연덕스럽게 그런 역겨운 언어들을 자신의 이름으로 활자화했다. 그리고 아무런 뉘우침 없이 '종천순일(從天順日)'이라는 궤변으로 그 행적들을 얼버무렸다.

그가 비슷한 세대의 몇몇 반동적 문인들에 견주어 실제로 누린 것 없이 이름만 더럽혔다는 점을 들어 도리어 그의 순박함을, 그 '시인됨'을 높이 사주자는 견해도 있다. 그가 실제로 누린 것이 대단찮았느냐는 판단은 별도로 하더라도, 그 사실이 그 행위들의 역겨움을 눅여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그의 공적 자아는 시시한 것이었다. [화사집]의 서시(序詩) 격인 <자화상>의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같은 대목은 그의 생애 전체를 미리 요약하는 예언의 울림으로 파닥거리지만, 이 구절들의 빛나는 진솔함이 그의 휘어진 생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반면에, 그가 긴 생애 동안 발표한 단 몇 편의 역겨운 '기념시'들을 근거로 그의 시세계 전체를 깎아 내리려는 시도 역시 옹색하다. 누군가가 미당의 시에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가 아직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화사집]에 실린 스물네 편의 시만으로도, 한국문학사는 그에게 경의를 표할 만하다. 결국 미당의 삶은 시시했지만, 그의 시는 시시하지 않았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인격의 불연속성이라는 해법을 제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오장 마쓰이 송가>를 쓸 때의 미당과 <무등을 보며>를 쓸 때의 미당은 다른 자아를 지녔다고 설명하는 식이다. 어제의 내 뇌세포들이 오늘의 내 뇌세포들과 완전히 동일할 리는 없으니, 이것은 보기에 따라 그럴 듯한 설명이다. 그러나 이런 자연과학적 곡예는 어떤 생애에 대한 평가 자체를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한다.

이런 평가의 혼돈과 불능을 치유할 길은 없는가? 있다. 문학적 재능 곧 글 쓰는 재주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춤추는 재능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선선히 인정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행적이 아니라) 문인으로서의 정치적 행적을 심문하는 것은 무용가로서의 정치적 행적을 심문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일이라는 점이 또렷해진다. 문학이라는 장르에 특별한 위엄을 부여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슬픈 일이겠지만, 문학은 그 정도로 시시한 것이다. 엄중한 것이 삶과 역사라면, 하찮은 것이 문학이다. 미당은 시시한 삶을 살면서도 결코 시시하지 않은 문학을 이뤄냈고, 그럼으로써 문학이라는 행위 자체가 시시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고종석, 모국어의 속살 中)